탄생지에서 망명지까지

어린시절 달라이 라마

1950년 여름 오페라 축제 바로 전날 노르부링카(Norbulingka) 궁전에서 달라이라마께서는 욕실에서 나오시다가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셨습니다. 이 자연 현상의 크기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것이 단순한 지진 이상의 흉조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틀 후 섭정을 하던 따닥 린포체(Tathag)은 참도(Chamdo)에 있는 캄(Kham)의 지사에게서 중국 군이 티베트 주둔지를 습격했다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이미 지난 가을, 제국주의 침략자들로부터 티베트를 해방시킨다는 명목 하에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국경을 넘어 급습을 했었습니다. “마치 중국은 그들의 위협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그리하였다면, 나는 군관과 장정들을 소집하여 8,500명도 되지 않았던 우리의 군대가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군대는 당시 승승장구하던 인민 해방 군(People's Liberation Army (PLA))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두 달 후 10월, 8만 명의 인민 해방 군이 참도(Chamdo) 동쪽의 디리추(Drichu)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라사에 당도하였습니다. 이는 국운이 다하였음을 의미했고, 얼마지 않아 라사가 함락될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겨울이 찾아오고 상황이 더 악화되어가자 달라이라마를 전권을 가진 지도자로 추대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점점 강해졌습니다. 정부는 예언자 네충신 (Nechung)의 조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숨 죽였던 순간, 그는 앉아 계신 성하의 무릎 위에 흰색 카다(Kata)를 올리고 '뒤라밥(Thu-la bap)'이라고 외치며, 성하의 시대의 시작을 알립니다. 성하께서 15세가 되셨던 1950년 11월 17일, 성하를 티베트의 지도자로 추대하는 행사가 노르부링카(Norbulingka) 궁전에서 열렸습니다. 성하의 추대식이 있기 2주 전인 11월 초, 성하의 큰형이 라사에 당도하였습니다. “그를 보자마자, 나는 그가 크나큰 고초를 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꿈붐(Kumbum) 사원이 위치한 우리가 태어났던 암도(Amdo)는 중국과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은 그곳을 빠르게 점령했다. 그는 사실상 사원에 포로로 잡혀있었다. 그들은 그가 내가 중국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한다면 그를 라사로 갈 수 있도록 풀어주겠다는 계략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내가 저항한다면 그에게 나를 죽이라고 했고 그러면 그들이 그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달라이 라마로 추대를 기념하여 달라이라마께서는 모든 재소자들을 사면하셨습니다. “가끔 후회 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 일을 기쁘게 생각했다. 내가 망원경으로 영내를 봤을 때 음식 찌꺼기를 뒤지는 몇 마리의 개들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무언가가 나의 인생에서 빠져나간 것 같았다.”
15세의 달라이 라마께서 그가 전면전의 위협에 직면한 6백만 티베트인의 절대적인 지도자라는 것을 깨달으신 직후, 달라이라마께서는 두 명의 수상을 새로이 임명하셨습니다. 롭상 따시(Lobsang Tashi)가 승려 수상이 되었고, 재속 행정관 경력이 있는 루캉와(Lukhangwa)가 재속 수상이 되었습니다.
“그 일이 끝나자 나는 그들과 논의하여 미국, 영국과 네팔이 우리를 대신하여 중재해주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내각(Kashag)을 대표단으로 하여 이 나라들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또 다른 대표는 철수를 협상하기 위하여 중국으로 가도록 했다. 그들의 임무는 그 해 말까지 계속됐다. 얼마지 않아 중국이 군사력을 동쪽으로 집중시키자, 내가 정부의 가장 고위 관료들과 함께 티베트 남부로 이동해야만 한다고 결정이 내려졌다. 그와 같이 하여, 만일 사태가 더 심각해진다면, 쉽게 인도 국경을 넘어 망명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는 동안, 롭상 따시(Lobsang Tashi)와 루캉와(Lunkhangwa)는 임무를 다하며 남아있었다.”

달라이라마께서 시킴(Sikkim)과의 국경선 안쪽에 위치한 드로모(Dromo)에서 지내실 때, 중국으로 갔던 대표단은 그들의 목적지에 도착하였지만, 다른 대표단은 모두 되돌아 왔다는 소식을 받으셨습니다. 영국 정부가 중국의 티베트에 대한 통치를 인정한다는 것은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또한 달라이라마께서는 미국이 도움을 주는 것을 주저한다는 것에 슬픔을 느끼셨습니다. “나는 정말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때 큰 슬픔을 느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티베트가 홀로 중국 공산당의 총 공세에 맞서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 무관심에 좌절하여, 성하께서는 중국의 전면 공격을 피하기 위한 마지막 방안으로 중국과의 대화를 위하여 캄(Kham)의 주지사였던 나보 나왕 직메(Ngabo Ngawang Jigme)를 베이징으로 보냈습니다. 대표단은 중국의 티베트 침공에 반대하여 중국 지도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맡겨진 임무를 제쳐두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내가 홀로 앉아 있는데, 거칠고 치직거리는 음성이 그 날 (1951년 5월 23일) 중화 인민 공화국 정부와 그들이 티베트지방정부라 지칭한 그것의 대표가 평화적인 해방을 위한 ‘17개 동의안(Seventeen-Point 'Agreement)’에 서명했다고 발표하는 것을 들었다.” 티베트의 국새까지 위조한 중국이 나보(Ngabo)를 대표로 한 대표단에게 강압에 의하여 동의안에 서명하도록 했다는 것이 이후 밝혀졌습니다. 중국은 군사적인 영향력을 사용하여 티베트가 그들의 조건에 따르도록 함으로써 중요한 쿠데타의 실제적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한편 성하께서는 1951년 8월 중순 라사로 돌아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