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지에서 망명지까지

망명지에서

라사를 떠난 지 3주 만에 달라이라마와 일행들은 인도 국경에 당도했습니다. 그곳에서 인도의 경비대와 함께 봄딜라(Bomdila)로 떠났습니다. 인도 정부는 이미 달라이라마와 일행들을 망명에 동의했었습니다. 무소리(Mussoorie)에서 달라이라마께서는 인도의 수상과 만남을 가지고 망명 티베트인들의 구제를 위한 논의를 하셨습니다.

망명한 티베트 아이들에 대한 현대식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계시던 달라이라마께서는 인도 교육부와 함께 티베트인 교육을 위한 독립적 협회의 설립에 착수한 네루(Nehru) 수상에게 감동을 받습니다. 인도 정부는 티베트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는 데에 대한 모든 비용을 부담하기로 합니다.

“때가 되었고 나는 그 동안 지켜오던 침묵을 깼다.” 1959년 6월 20일 달라이라마께서는 ‘17개 동의안’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는 기자 회견을 소집하셨습니다. “나는 행정 분야에서 또한 커다란 변화를 만들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달라이라마께서는 다양한 티베트 정부 부서의 신설을 지켜보셨습니다. 이들은 정보부, 교육부, 국무부, 안보부, 종교부, 경제부였습니다. 거의 3만 명으로 증가했던 망명 티베트인들 중 대부분은 북인도 산악 지대의 노변 임시수용시설로 이주했습니다.

1960년 3월 10일, 티베트 망명 정부를 구성하는 80여명의 관료들과 함께 다람살라로 떠나시기 직전, 달라이라마께서는 ‘티베트 민중 봉기 기념일’에 처음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셨고 그 이후 매년 성명서를 발표하셨습니다.
“첫 번째 성명을 발표함 있어, 나는 우리 티베트인들이 티베트 문제에 대해 장기간의 관점을 가져야 할 필요를 강조했다. 망명을 떠나온 우리를 위해, 무엇보다도 우리의 문화적 전통의 지속과 정착이 중요하다는 점을 말했다. 미래에 대해서, 진실과 정의와 용기가 우리의 무기이며 티베트인들은 결국 티베트에 평화를 되찾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전달했다.